그 15.


 "그러고보니, 여기에 뭔가가 있다는 걸 확신했다고 했었지?"

 "네."

 "걸어가는데 좀 걸릴 거 같은데, 그 동안 심심하니까 설명을 들었으면 하는데?"

 "그래요, 심심하니까 설명 좀 해주세요!"

 …어째 의도가 이상하긴 하지만, 뭐 심심한 건 사실이니까 설명을 시작했다.

 "음…… 그러고보니 프릭츠 씨는 이 세계에 온 적이 있었다고 하셨죠?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이죠?"

 "지금으로부터?"

 "네. 지금으로부터."

 굳이 강조할 필요까진 없었는지, 잠깐 날 흘겨본다. '말 안 해도 그 의미라는 거 안다'는 의사표현인 것 같다.

 "어디보자… 대충 기억나는게 대략 5년 전과… 약 400년 정도 전이네."

 "400년 전?!"

 아니, 400년 전이라면 그 때잖아!

 "그러고보니 그 때 전쟁이 일어나던 중이였지 아마. 여기 기준으로 5년 전에 왔을 때도 아직 전국시대던데, 그 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케트니아 공국이 다시 분열된 거야?"

 "……좀 복잡하다 들었어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어디선가 들을 수 있겠죠."

 "그럼, 모른다는 이야기인가요?"

 "들었대잖아. 어차피 지금 필요한 것도 아닌 거 같고, 그냥 그 이야기나 계속해봐."

 "네… 여하간, 400년 전이 전국시대였다는 건 아시죠? 그 때 아델 마을에 한 패잔국의 잔병들이 온 적이 있었어요."

 "잔병? 그것만 온 게 뭐가 문제죠?"

 "왕족이 몇 명 같이 왔던 모양이에요. 여러 정황을 볼 때 우리 마을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던 거라고 기술된 걸 보면."

 그 말만 듣고도, 프릭츠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그리고, 그 기록은 말소됐고?"

 "네. 이상하게 다른 부분은 정상적인데 그 잔병들에 대한 서술만 완전히 지워져있어요. 다른 도서에도 관련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이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도망친 뒤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만 나오고, 유일하게 그 기록이 되어있을 거라 추정되는 '아델 마을의 역사' 4권에서도 그 부분만 지워졌어요."

 "누군가가 역사를 지워버렸군."

 "네."

 "자, 잠시만요? 역사를 지우다뇨?"

 왠지는 몰라도 당황하는 파누엘 씨. 그 자리에서 멈춰선 채 당혹해한다.

 "……넌 또 갑자기 왜 그래?" 

 "아니, 그게 말이 돼요? 역사를 지운다는 게?"

 "………아아, 그런 거였냐. 이~~~ 멍청아!"

 순간, 프릭츠 씨의 고함이 숲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나나 파누엘 씨나 귀를 틀어막았고, 조금 뒤 파누엘 씨는 맞고함을 지르는 대신 행동으로 들어갔다.

 사타구니에 킥을 날려도 별 영향은 없다. 그렇다면?

 "안됐지만 꽝이야. 파누엘 넌 너무 가볍다고."

 "………………쳇!"

 혼신의 힘을 다해 발을 밟아버렸지만, 불행히도 프릭츠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제발 머리 좀 써라. 애초에 역사라는 게 뭔지부터 생각해보면 알잖아!"

 "역사가 뭔데요?"

 아무래도 저 아가… 사람은 교육기관에서 역사 관련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

 프릭츠 씨도 이 시점에서 정신줄을 놓아버리고는, 다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역사란! 말이다! 글이나! 그 외의! 무언가로! 남겨진! 과거의! 기록들을 의미하는 거다! 알간?!"

 "아니, 보통 역사라는 건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의미하는 거 아니였어요?"

 그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프릭츠 씨. 역사의 의미를 잘못 알았다면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것들은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거야. 그런 기록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아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처리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뻔할 뻔자 아니냐?!"

 "아,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지운다'는 거군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구나."

 찻잔을 손바닥에 내려놓는 시늉을 하는 파누엘 씨. 프릭츠 씨는 더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고 한숨을 깊게 쉰다.

 "그래, 이 놈은 항상 이랬지."

 "고생 많으시겠어요."

 "아아."

 "지금 내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에요?"

 파누엘 씨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물었지만, 대답하는 대신 설명을 계속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미 대패하고 아주 적은 병력만 남아있는데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 기사회생을 노릴만한 것이 있었다는 거지."

 "네, 그리고 왕국이 어느 정도 인망이 있어서 적은 양이긴 했지만 징병도 가능했으니까, 결국…"

 "한 방에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무언가의 병기."

 신기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들은 것일 뿐인데, 내 추리와 동일한 결과를 내놓는다.

 "신기해 보여?"

 이런, 내 생각을 단박에 읽어버렸다.

 "네… 잠깐, 설마 제 생각을 읽는 건 아니겠죠?"

 잠깐 고민하다가, 귓속말을 하는 대신 케트니아 어로 말한다.

 "읽을 수 있었다면 내가 왜 이 놈 때문에 골치를 썩히겠냐."

 "그렇겠네요."

 절로 납득이 간다. 옆에서 파누엘 씨가 나와 프릭츠르 번갈아보긴 했지만, 딱히 이렇다할 딴지가 떠오르지 않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지웠다는 건 어떻게 확신했어?"

 "그게 기록되어 있어야 할 부분에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엄청난 공백이 있었어요. 한번 다른 세계에서 온 한 분에게 조사해달라 부탁해봤는데, 무언가 마법적인 처리로 완전히 지워져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 사람은 역사 따위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서, 다른 단서가 없다는 것에 실망하고선 그냥 작은 보수만 받고 갈 길 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좀 아까웠다.

 "그리고 그 부분의 위에 문제의 시를 덧쓴 거고요."

 "그 정도면 확신하지 않을 수 없겠네. 하지만… 괜찮겠어?"

 "네?"

 착각이 아니였다.

 프릭츠의 동공이, 순간 붉은 색으로 변한다.

 "추측이 맞다면 그건 분명 꺼내선 안 될 위험한 병기일텐데."

 "……제가 원하는 건 이 전설이 진실인가 아닌가 증명하고, 그것이 진실이라면 정체를 기록해 남기는 겁니다."

 "그럼, '역사'를 되찾고 싶다는 건가?"

 '역사를 되찾는다'라… 아마, 그렇겠지. 잠시 머뭇거렸지만,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릭츠 씨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눈은 다시 갈색으로 되돌아갔다. 

 조금 뒤…

 "에휴, 결국 꺼내봐야 한다는 건 변함없으니까 이 쪽이 어떻게든 처리해봐야겠지. 이제 가자."

 이 말만 하고 갑자기 간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역시나 너무 뜬금없다보니 이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또다시 "자, 잠깐만요!"라는 얼빠진 소리를 하면서 따라 쫓아가야 했다.

 

 

 그 16.

 

 활엽수에서 갑자기 침엽수로 바뀐다.

 한 특정한 선을 경계로, 나무의 종류 자체가 달라지는 것에 조금 놀랐다. 아니, 그보다…

 "…이 나무, 정체가 뭐지?"

 "유피누라라고 하는 수호수에요."

 호오…… 이거 말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기, 그 시에선 이 숲을 작은 숲이라 하지 않았어?"

 "네. 무슨 문제라도?"

 역시나. 눈치 전혀 못 챘다.

 "……400년 전에 작은 숲이라 되어있었다면, 지금은 상당히 숲이 커졌다는 생각도 가능하지 않나?"

 "아."

 멍해진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눈의 초점을 날린다. 꽤 재미있는 광경이긴 한데, 많이 봐왔던 거라 그다지 감흥은 안 난다.

 "……왜 그걸 생각 못했지?"

 "무엇보다, 이 나무들, 그러니까 이 활엽수들은 후대에 심은 거 같은데."

 "……네. 그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심은 거라고 해요. 대체 내가 왜 이걸 눈치 못 챈 거지?"

 확실히 이상하다. 분명 머리가 좋은 사람인데 왜 알아차리지 못 한 걸까.

 하지만 지금 그런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거나, 문제의 그건 이 안쪽에 있다는 이야기지?"

 "네. 그런데 파누엘 씨 괜찮은 건가요?"

 "아, 안 괜찮아요……."

 내 등에 딱 붙은 채 거의 매달려있다시피한 파누엘. 이 녀석이 가진 힘을 생각해보면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 꼴이 좀 정신사납다. 하지만 이리 불평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마을에서 이 놈이 사고를 치는 것보다는 지금 조금 불편한 쪽이 더 낫다.

 "이 놈은 저런 신성수와는 궁합이 상당히 안 좋아.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걸 중화시킬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아."

 "맞아요…… 그러니 볼 일 빨랑 보고 가요……."

 기운이 아주 확 빠져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확인할 것이 먼저 있다는게 문제다.

 "파누엘."

 "네에……?"

 "니가 좋아하는 그거 꺼내."

 "에에…… 왜 지금 여기서 그걸 꺼내야 돼요…? 귀찮은데……."

 아주 확 늘어지셨구만. 제기랄, 지금 여기서 이런 짓을 해야 하나 싶지만 어쩔 수 없다.

 "라하르. 이리 불러도 되지? 이름으로 부르기엔 좀 혼동이 많이 될 거 같은데."

 "네."

 "이 쪽으로 가까이 와."

 "네?!"

 ……저기서 당황한다는 건 그 쪽 계열을 안다는 이야기잖아?

 "비누 주워달라던가 하는 이야기는 안 하니까 걱정 말고 와."

 "…그건 뭔가요?"

 아차, 저번에 머물렀던 세계에 너무 오래 있었나.

 "동성애 관련 농담이야.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와."

 질겁하면서도 이 쪽으로 슬금슬금 온다. 몸은 꽤 건장한데 저러는 거 보니 귀엽네.

 대충 어느정도 가까이 온 걸 확인하고, 이 상황에 맞는 게 뭐가 있나 잠시 생각해봤다.

 찾았다.

 "음, 딱히 주문같은 걸 외울 필요야 없긴 한데 그러면 좀 심심하지 않겠어?"

 "네?"

 황당함의 연속이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게 네? 하고 물어봐야―
 저게 주문인 걸 어쩌겠어? 내가 마음대로 외치면 그게 주문이기야 하긴 하지만.

 내 주변에, 잠시 돔 형태로 아지랑이가 펼쳐졌다가 사라진다. 이걸로 유피누라라고 하는 저 수호수의 영향은 잠시 차단된다.

 "어, 개운해졌다."

 파누엘이 날 붙잡던 걸 놓고 기지개를 편다. 반응 참 빠르다.

 "……방어막인가요?"

 "치는게 보였나 보네?"

 "아뇨. 하지만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서요."

 이질적? 이런, 재구성에서 살짝 실패했나. 원래대로라면 아무런 위화감이 없어야 정상인데.

 "아까부터 숲에서 흘러나오던 은은한 느낌이 사라졌는데, 파누엘 씨가 그거에 영향을 받은 건가요?"

 어라, 그 위화감이 아니였나보군.

 "그래. 왜 그런지는 본인이 설명을 안 해서 몰라."

 "그리고 난 말하고 싶지 않고요."

 "봤지?"

 어이없어한다. 하기야 상식과는 상당히 떨어져있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하다.

 "어쨌거나, 이제 그거 꺼내." 

 "네~."

 파누엘이 왼손 약지에 걸린 반지를 하나 뺀다.

 "어, 저건 약혼반지 아니에요?"

 "낸들 알랴?!"

 라하르의 한 마디에 순간 고함을 질러버렸다. 그러는 사이 파누엘이 반지에 박힌 보석을 꾹 눌렀고, 곧 땅바닥을 향해 한 줄기 빛이 뛰쳐나온다. 그리고 점차 내가 주문한 물건의 형태에 가까워진다 …

       '빰빠라밤!'

 "으, 으아아아아악!"

 라하르가 날아오른다. 나비가 한 마리 날아가는 것 같… 아니, 이건 검은 원숭이가 무공을 쓴다고 하는게 더 설득력이 있겠는데?

 여튼 그렇게 깜짝 놀라서 튀어올랐다 땅바닥에 예술적으로 엎어진 라하르. 조금 뒤 일어서서는 방금 소환된 그것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른다.

 "저, 저 문어처럼 생기고 쓸데없이 시끄러운데다 괴상한 물건은 뭐죠?!" 

 "…글쎄다."

 그걸 꺼낸 파누엘도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긴 한데, 저건 그냥 저 반지에 있는 수많은 물품 중 저것만 꺼내는 작업을 귀찮아해서다. 저 문어 자체는 집어들어서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고 있다.

 상하로 납작한 문어가, 8개의 나팔 모양의 팔을 방사형으로 벌리고 있다. 진짜 문어는 아니고 그처럼 비슷하게 제작된 물건이지만, 감성은 괜찮은지 어느 정도 의사표시를 할 정도의 인격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파누엘이 저리 쓰다듬으니까 기쁘기라도 한 듯이 팔을 흠뻑 떨고 있다.

 "신 탐색기. 근처에 이교에서 신이라 부르는 존재가 있으면 탐지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탐색기에요."

 "어? 그런 건 갑자기 왜요?"

 "이 탐지기의 작동 원리 때문에……."

 말을 하다가, 순간 이 녀석의 배경 지식이 얼마나 되는가 확인할 수가 없어 말하기가 꺼려졌다.

 흠, 이건 한번 물어봐야 되나.

 "이 세계의 사람이니 마법은 당연 믿을 거고… 관련 지식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까? 어이어이, 활 안 쏴도 되니까 동작 그만."

 말을 중간가지 했을 때, 라하르는 자신의 손에 활을 잡고선 화살을 쏘려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뒤로 잡아당긴 손에 푸른 빛이 아른거리는 걸 보면 마법 사용이 가능한 것 같지만, 지금 내가 요구하는 건 그런 쪽이 아니다.

 "그러니까, 제가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 궁금하시다는 거죠?"

 "그래."

 라하르는 대답 대신, 등에 지고 있던 가방―작업하다 곧장 식사하러 온 건지, 우리와 만나기 전까지 있던 자리에 놔뒀었다. 험하게 다뤄도 별 문제는 없는 줄 알았는데?―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옛날에 누가 여관에 놔두고 간 책이에요. 제가 제대로 아는 건 이 책의 내용 뿐이긴 하지만… 왜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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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15는 원래 쓰려고 했던 것과는 내용이 좀 다릅니다. 날아간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서 결국 그 자리서 다시 써야 했습니다.. 분량도 이것보다는 적었고요.
결국 어느쪽이 더 나은지는 지금은 판단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번엔 고작 2개인데, 대신 지금까지에 비해 하나당 분량이 많아서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생각하고 정지한 겁니다. 아 그렇다고 과학자들 책임은 아닙니다.

자, 스포일러는 이번에도 갑니다.


_M#]


다음엔 이 쪽에 먼저 6화를 올린 뒤, 하사호에 옮겨야겠습니다.

당연하지만 해설은 이쪽에만 옮길 예정입니다. 하하하!


…―


Posted by 쿠루미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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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I.F.사가라는 주인장 뇌 속에서 이리저리 자유영 접영 배영 횡영 다 하고 다니는 세계관을 다루는 블로그입니다. 룰루랄라. by 쿠루미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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